[센치한독후감]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2021. 12. 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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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에서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사소한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선택"에 신중을 기하려는 건 다시는 선택할 수 없다는 그 중압감에서 온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떠한 완벽한 삶을 꿈꾼다는 건 사실 "비교"에서 온다.
그 비교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서 찾는다해도 나의 어떠한 선택은 불행을 가져올것이라고 비교하기때문이다.

항상 어떠한 것이든 그것에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부여하고자 하는 순간에 진정히 그 의미가 부여된다는 말을 믿는 나는,
이러한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고자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열망을 나타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 "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나에게 끼치는 경중에 맞추어 삶을 살고 있다.
'무'의미한 것을 차치하고 '유'의미만 한 것에 집중하면서 그 유의미함을 이어가려는 노력.
나는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또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삶의 기쁨은 그 선택한 유의미에서"만" 느낄수 있는 기쁨이라고 자부해왔다.

모든 경기에서 다 이기지 않아도 승리가 어떤 기분인지 알수있다.
모든 음악을 다 듣지 않아도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포도를 다 먹어보지 않아도 와인이 주는 즐거움을 알 수 있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중의 노라는 기대했던 "삶" 자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살아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100점을 맞았던 날의 기쁨과 60점을 넘겨야 했던 성적에서 80점을 맞았던 기쁨을 떠올려보았다.
다 같은 기쁨이었다.
어떤 것이 더 기쁘고 더 의미가 있었으며 더 행복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그 각각의 나름에서 나는 기뻐했고 행복했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에서 올 것-그렇게 단정지어 이미 확신해버리는-이라고 예상하는 행복이 지금이나 과거에서 마주한 행복과 다를까? 또다른 행복이지 않을까? 하는 고정적인 생각들이 뒤엎어져버렸다.
돌이켜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과 상황들은 서로 무관한 경우가 많았고, 시공간이 한참이나 달라도 사실 느꼈던 감정들은 모두 같았다.
나이가 들어가면 그 시기마다 반드시 이루고 쟁취해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왔고,
반드시 그것들만이 내 삶에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왔던 터라, 생각의 뒤엎음의 너비는 넓어지고 깊이도 더 깊어졌다.
한 번 석탄은 영원한 석탄이라고 단정지었던 노라도 "어쩌면 또 커피를 마시자고 하려는 지도 모른다" 던 애쉬를 결국 찾아가 살고 싶었던 삶 으로 날아간다.
그토록 죽고 싶어 했던 노라도 북극곰 앞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듯
모든 것은 변한다.
진실이나 사실은 그대로라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은 변한다.
첫번째 삶의 여정에서부터 노라는
(앞으로 갈 삶이) 직전의 삶보다 너 나쁜 삶이면 어떡하냐는 노라의 걱정이 그녀의 삶이 최악이 아니었다는 것의 반증이 되어버린다.

무슨 일 해? 결혼은 했어? 남편은? 아이는?


~가 되지 못했어. 올림픽 출전을 못했고, 빙하학자가 되지 못했고, 아내, 엄마, 리드보컬이 되지 못했다는 노라의 말은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만, 무언가를 얻어야만 '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소개를 할때 한번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에 사는 ~~입니다. ~~일을 하고 있고 아이 둘의 엄마입니다"
사는 곳과 직업과 구성원에서의 위치만이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마치 수영의 장점은 점차 사라진 채 더는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고 지금 하는 일 '그 자체'가 되어버렸던 노라처럼
우리는 우리가 하고 일과 위치만이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그대로 그녀의 자서전 "가라앉거나 수영하거나" 와 같은 이분법적 설명방식이다. 어딘가에 살지 않고 어떠한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없어지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

"~를 좋아하고 ~를 하고 싶은 ~~ 입니다" 라든가하는 문구로 나를 써내려가기에는 부끄럽다는 핑계를 댄다면
가장 부끄럼없이 말할 수 있는 친한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나 돌이켜 보면 한번도 없었다.
휴대폰을 움켜쥐고는 SNS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고 팔로워 수를 인생의 성공의 척도로 삼는 노라의 모습처럼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이 내가 아니라, 요즘 남에게서 평가받는 내가 "나"가 된다.

노라는 연설장에서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 성공이 아니며, 외부적으로 무언가 성취하는 걸 성공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수백만의 팔로워를 지니고 동경한 가수의 연인이 되고, 금메달을 따는 것이 성공의 척도이며 그렇게 살았어야만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던 노라의 삶 속에 자기성찰같은 말을 뱉는다.

어떤게 좋은 삶인지 알려주면 안 돼요?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고 되뇌였던 댄과의 결혼생활을 경험한 노라는 상상했던 삶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여러 가보고 싶었던 삶을 다니면서 아주 짧게는 1분까지만 지내다 그렇게 결론을 지어버린다.
때로는 그 삶속에 불청객처럼 끼어든 죄인 내지는 도둑같은 기분을 느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이동자'의 여행에서 노라는 분명 똑같은 감정의 군집화를 이뤄냈을 것이다.
북극곰에 대항한 광란의 프라이팬 두들기기도 올림픽 금메달과 똑같이 뜻깊은 일이었고,
삶은 이해할 필요가 없이 그냥 살면 되는 이유도 죽으려 했던 그 첫번째 삶이 결국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었다는 것을 알아낸것 처럼.

난 이 소설이 혹
약에 취해버린 한 환자의 정신세계 속 가상의 타임트래블이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리는 약에 취하지 않아도 늘 노라와 같은 꿈을 꾸며 살고 있고,
결국 모든 삶은 정말 다 살아볼수도 없고 모든 사람을 다 만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으며 살아가게 될테니까.

우리가 가고자하는 삶, 지나쳐버린 가고자 했던 삶 모두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뚜껑을 열기전에는 죽었을 수도 살았을 수도 있는,
그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 인정한다면 말이다.

- 센치한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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