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매혹으로 이끄는 형이상학적 여행 "고독의 매뉴얼"

2020. 4. 2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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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매뉴얼
국내도서
저자 : 백상현
출판 : 위고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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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의 매혹으로 이끌어버린 형이상학적 여행

  영화를 보고 나오는 출구에서부터의 발걸음은 그 영화에 몰입한 관객을 어느새 작중 배우의 옆자리로 안내한다. 매너라는 변주를 곁들여 임무 수행의 잔혹한 장면들을 희화화했던 킹스맨이라는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온 중년에게 신사와 양장점, 그리고 우산에 몰입하게했던 경험이 대표적이다.

  퇴근길 "고독"이라는 첫글자를 들고 있던 나를 바라본 나의 한 선배는 그 제목에 코웃음을 치며 이 책을 가벼이 여겼을지라도, 나에게는 그 매너가 남자를 만드는 일찍한 경험 그 이상으로 고독으로의 여행길에 나서게 했다.

  "고독의 매뉴얼"로의 여행은 "고독" 그것은 유령의 존재이며, 말미에 독자가 유령이 되기를 희망하고 피력한다.

  경험속에서 규정지은 형태로 생각하는 능력을 생산하는 인간 사유의 정점에서 이를 새로운 지식을 발산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여행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고독의 메뉴얼"은 여러 방면으로 독자의 사유를 사로잡는다.

  저자는 저서 어디에도 "외로움"이나 "쓸쓸함"이라는 사전적 층위에 독자를 놓아두고 떠나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성의 화신, 셜록홈즈와 코난도일

  삶을 곧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의 연속성 속에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유사성에 있다. 

  이것은 마치 소설가 이상의 건축학적 담론과 정신분열적(정신 분석이 아니다) 담론이 문학이라는 영역으로 침투하여 방한켠에서 아내가 건네준 아달린에 대항해 "날개"를 펼치고 13인의 "아해"들을 도로로 내세웠던 것처럼, 삶을 찾는 과정이며, 아울러  "나"라는 존재적 의미가 타자(他者)에 의한 내가 아닌 것에서 출발해야함을 알려준다.

  심령과학에 심취했던 코난도일은 그의 투영체 셜록홈즈에게 코카인을 선사했다. 실제 존경했던 의대시절 교수를 모델로하여 논리적 공간과 불확실한 미스테리의 공간 속에서 긴장을 유발시키고 욕망의 공식을 세워나갔다.

  셜록홈즈가 사망한 이후에도 꽤 오랜기간 독자들의 원성을 닫은채, 미래로의 "부활"로 홈즈를 등장시키지 않고 "과거"로의 이야기로 홈즈를 부활시킨것은  논리적 공간(거기에 시간을)을 다양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자연수라는 질서와 집합의 강박

  거식증으로 상담을 받으러 간 한 여인의 말실수 였던 "잡놈"과 "잡녀" (어머니의 부재속에서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가 사랑한 여자들에 대한 정의) 처럼 인간은 각자의 자연수의 집합으로 삶을 정의한다.

  누구에게는 1,3,5,7 이라는 홀수의 나열로, 누구에게는 2,4,6,8 이라는 짝수의 나열로 삶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 둘을 모두 합하여 1,2,3,4,5,6,7,8 이라는 모집합으로 자연수를 표현할 수는 있지만 1,3,4,7 과 같이 홀수의 집단에 4라는 짝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4는 이곳에서 "잡놈" (실수이지만 잡녀")로 치부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림이 단지 물감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할 것

 

 

   미술사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노력으로 정의되는 이 문장은 해바라기라고도 볼 수 없는 누군가에게는 기괴한 꽃을 그려낸 반고흐의 해바 

라기는 연기(演技)와 환상이라는 은폐로 환상의 영역으로 횡단한다. 해바라기는 실존적 존재이면서도 환영(幻影) 내지는 환상의 세계를 이어준다. 

  그저 꽃병에 쓰여진 빈센트라는 이름이 그 세계를 넘나든 다다이즘 여행자임을 알려줄 뿐이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그것을 뛰어넘는 다다이즘적 작품들이 초현실주의 세계와 상통한다고 했을때 이러한 세계로의 여행은, 어쩌면 "살바도르 달리"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의 첫 장면과 같이 보름달위로 구름이 지나간 뒤에 여성의 눈동자를 면도칼로 스치는 섬뜩함(그러기에 그 장면은 사진을 싣지 않았다)을 느껴야만 할 것 같은, 또는 무관심 내지는 무덤덤함으로 바라봐야할 것 같은 의무감을 일으키게 한다. 

 

 

 

 

 

언어를 지배하려는 대 타자에 대한 조롱과 반항

 

베르메르의 "병사와 미소짓는 소녀"

 

  무산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일으켰던 프롤레타리아적 반항이라든가, 양반층을 우회적으로 조롱했던 "말뚝이"와 같은 치명적 매력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존재하듯, "베르메르"의 "병사와 미소짓는 소녀" 속의 소녀(타자:他者)는,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충분히 매혹적이다. 소녀는 미소라는 지배적 언어로 병사(어쩌면 우리)를 유혹하지만, 병사는 그저 담담한 뒷모습으로 이에 응하지 않는 "수신자"로 남겨진 상태이다.

  미소라는 강제된 현실의 언어에서 도래하는 시공간의 논리 속에서 무산계급과 노동자 계급과 하인들은 아마도 그 시공간을 해독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며, 그저 그때의 확신으로 투쟁했을 뿐이다.

 

 

 

 

 

 

 

새로운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의식에 의존하여 갈망하게 된다

  사물이 속한 각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고유한 본질을 발음하게 만들려던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속 피터는 다행히 뒤주속에 가두어 비극을 맞이한 사도세자와 같지는 않았다.

  고유한 본질을 발음하게 하려는 집합체인 도서관을 떠올리면, 그것은 결국 삶이라는 미로에 대한 비루하고도 지루한 반복적 욕망의 연속체이며, 결국 타자들의 지혜로 모여진 "자연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론 고유한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진리에 접근하는 대신 소멸을 선택했던 "뉴욕 3부작"속 퀸처럼 "고독"이라는 의미는 특수하지만 보편적 세계속에서 정의할 수 있다.

  가령 어떠한 것(또는 사건)에 충실한 대화를 하게 되면 공허한 느낌이 들게 되는데,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할수록 유토피아적이고도 비현실적인 대화로 구성되는 유아틱한 대화(어쩌면 유치한)로 이어진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공허, 고독으로, 공백으로 이어지는 무의 세계속에 있다한들, 사건이라는 "이름"의 규범에만 의존하지 않았던 갈릴레이와 반고흐가 지금 우리와 동시대에 살았다하여도 존재에 집착하고 의존하는 우리를 갈망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독의 선택 : 알려진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랑

  복잡 거대한 철학, 심해한 예술과 문학의 가치로 규명되어지곤 하는 "고독"은 그 가치 이전에 소소한 이상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진리와 반복이라는 거대한 역사와 일상적인 개인의 중첩으로 결국 만나게 된다.

  타자, 타인이 끼어들수 없는 순간의 공백. 이를 가로막으려는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고독"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 "비선택"적인 시공간 속에서 내가 "선택"함으로서 얻어진다.

  다만, 이러한 고독은 "무엇"에 대항하여 얻어진다기 보다, 도리어 "개방적인 고독"에 가깝다. "고독" 타인에 대한 배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들며 타인의 순수한 가능성을 이룰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가 된다.

  물론 사랑은 두명의 물리적 생물체를 하나라는 한명으로 묶어 충만한 쾌락을 선사하지만, 둘 사이의 명백한 고독의 국경(내지는 울타리)을 인정하고 서로의 저편에 존재하는 알 수없는 고독을 인정해나가는 고결한 존재로서 의미를 가진다.

   

 

현실적인 접근은 곧 현실도피의 출발점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서 보여지는 비현실적 총구의 거리는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는 말로 함축된다.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 사진과 그림의 특수성이 존재 이유를 지닌다.

   현실적 접근이 곧 현실 도피(비현실)의 출발점이 되는 것처럼, 남성적 욕망이 곧 여성적 욕망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마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일렉트라 컴플렉스가 이어지듯이)  

 

 

 

 

 

 

 

 

거울은 내 자신이 바라보는 내가 아닌 타인이 바라본 자신

  서로를 끝없이 비추는 거울이라는 존재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는 첫번째 투영물이다. 거울은 부모나 타인의 행동과 말로 의해 자신이 아이임을 자각하던 아이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지의 파편화를 정리하고 해소하는 온전한 대상이 된다. 

  다만, 거울을 바라본다는 과정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나에게 유지시키려는 마조히즘(masochism)적 증상에 지나지 않다고 할 수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리셔먼의 "무제필름 스틸" 속의 여성처럼 셀프 셔터를 손에 쥐고 감춘채, 이를 바라보는 남성들(타자)의 응시를 오롯이 자신이 좌우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신선하다.

 

빈 벽 증후군의 극복

  그림으로 가득찬 방에서 어느날 한켠의 그림이 없어져버린 방의 모습을 참을 수 없던 한 여성은 "빈 벽 증후군"이라는 미스테리한 심리적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러한 증후군과 같이 상실한 이미지를 대체하는 방법으로 "아름다움"을 선택한다.

  젊은 베르테르가 가질수 없었던 여인으로 인해 선택했던 극단적 결말처럼 어쩌면 비어짐과 끝이라는 "아름다움"으로 간다는 것, 그것이 고독의 완성품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꺼내어보고 싶지 않은 고독의 시간들과 사색의 시간을 영원히 덮으며

  어쩌다 발견한 방 한켠의 빈공간을 채우려는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고독)으로 들어가는 타락조차도 아름다운, 그렇게 공백과 투명에 접근하려는 아름다움, 그러한 고독의 매혹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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