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필로소퍼 2020년 1월호 감상평] 지독하도록 평등한 이름, "죽음"

2020. 4. 11.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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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계간) VOL.9
국내도서
저자 : 뉴필로소퍼 편집부
출판 : 바다출판사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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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 잊혀질때다

  시시콜콜한 철지난 우스갯소리 유머집 귀퉁이의 허튼 소리나 오탈자 따위가 아니다. 위의 이 한 문장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그 만화를 떠올린다면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미리 언지하지만 이 글은 만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피하고자 했던 어떠한 현상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담소를 나누어야 하는 그 어색함과 마주하려할때 잠시나마의 헛기침으로 감정을 추스려보는, 어쩌면 그 정도 즈음의 통과의례적으로 문을 열어야만 하는 뻔한 문구쯤으로 여겨주었으면 한다.

 

  "죽음".

  이토록 비정하고 차가운 명사 어휘가 또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부산물을 동반한 이 단어는 단 2음절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질없도록 만들수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부질없던 것들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사랑했던 모든 것을 떠나게 만들 수 있으며, 이 세상에 떠나보낸 모든 것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 세상 아껴왔던 소유했던 모든 것들과 손쉽게 작별을 고할 수 있으며, 이 세상 작별을 고했던 모든 것을 다시 마음속에 간직하게 만들 수 있는 아주 담담한 이 2글자.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은 죽어간다. 죽음이 곧 떠남과 이별을 의미한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과 반드시 이별하게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은 죽음으로의 진행형에 있다. 우리는 모든 생명에 "자라난다" 내지는 "성장한다"는 밝음의 거짓 희망과 꿈으로 죽어감을 덮으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믿고자 하는 대상에 맹목적으로 기대어 이번생의 쉼표와 더불어 다음 생으로의 이어지는 매개 내지는 부활의 필연적 존재로, 또 누군가에게는 지독하도록 평등한 단 한번의 "기회"라는 위로의 이름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수많은 눈물과 사연과 감정을 담아내었던 애증의 가장 짧은 단어, "삶" 그것을 도피하기 위한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목적지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세계보건기구인 WHO에서는 "소생할 수 없는 삶의 영원한 종말"을 죽음의 꼬리표로 붙여버렸고, 또 다른 법전에서는 "더이상의 호흡이 없는 불가역적인 정지 상태"즈음으로, 또 한편으로는 "살아있지 않은 생명이 없는 상태" 쯤으로 정의한다.

  지독하고 또 잔인하게도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에게 짝이 있다. 어둠에게는 빛이, 밤에게는 낮이, 슬픔에게는 행복이-너에게는 내가 있듯이-죽음에게는 삶이 있다.

  눈치채었는가.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아하는 그 단어들은 그 반대편의 어휘들로 인해 더 깊게 심장 속에 뇌리속에 박혀버린다. 모든 것이 빛이었고 낮이었으며 행복이었고 나일 수 없듯이, 모든 것이 삶이였다면 죽음은 정의할 가치를 소실하게 된다.

 

  2음절의 단어임에도 벌써 몇 문장의 재잘거림으로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죽음"이라는 담담한 이 현상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것이고 우리 모두의 주변의 또다른 우리가 겪어보게될 현상이다. 우리와 절대 멀리있는 단어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배고파 죽겠어" "힘들어 죽겠어" "슬퍼서 죽겠어" 라는 투정의 관용적 심리의 표상들에게 조차도 죽음이 들어간다. 그렇게 모든 일상에 죽음은 공존하고 있듯이.

 

생명, 살아있음의 반대만이 과연 죽음의 의미인가 - 심리적인 죽음

  때로는 단순히 정말 죽음이라는 그 의미가 생명의 끝이나 이어짐을 의미하는 생물학적 정의만으로 받여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선다.

 

  - 지독한 감기에 걸려 침대의 머리맡에 누워 쓸쓸한 아픔에 시달리고 있을때면 어김없이

  - 때로는 아주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난뒤에 

  -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을 겪고 난뒤에

  -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거나 힘들어할 때 그 어떤 회복에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나의 무의미한 존재에 직면한 뒤에는

 

   단순히 죽음은 생명의 끝을 의미한다는 정의 내리기의 행위를 해왔던 나의 냉철했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그리고는 죽음은 과연 얼만큼 나의 가슴을 짖이겨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존재일지, 서늘하고도 따사로운 하늘빛 아래에서도 나를 얼만큼 싸늘하고 오한이 서리는 심리적 고통으로 몰아세울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리게 해, 눈물이라는 소리없는 고통의 결과물로 도달하게 만든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겪었고 ,겪고 있고, 겪을 많은 일들이 죽을만큼 가슴이 아팠던 이러한 모든 것 자체가 정말 죽음과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의미, 그 마주해야할 슬픔의 깊이와 그 얼마간의 추스름의 기간, 마주쳐버린 충격의 강도를 떠나 "사랑"과의 작별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단계로 귀결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나 자신이, 아픔을 느끼고 있다 초인지한다면 분명 그것은 죽음이라고.

  (이런 표현들이 단순히 감성-내지는 감상-적인 표현이라고 하여도 어쩔수 없다. 그 누가 죽음앞에 감성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요즘들어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잃어야만 한다, 떠나야만 한다고 느껴서 인지, 나의 이러한 심리적 죽음 상태는 결코 남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심리적으로 누군가와 무언가를 잊어야하고 반대로 누군가와 무언가로부터 잊혀짐을 당한다는 그 상태가 나에게는 그 자체가 심리적 죽음으로 도저히 참기힘든 고통을 수반한다.  

  

  

죽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미리 슬퍼해보라.  

  이별을 대할 준비도 슬퍼할 준비도 되어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이말은 아주 그럴싸한 포장으로한 거짓이다) 막상 그 죽음에 직면했을때 아주 오래도록 슬퍼하고 또 더 소름돋게도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 이따금씩의 사자에 대한 안위와 위로라는 이름의 떠올림으로 그들을 그리워하는 노력을 한다.

  수많은 수백번 수천번의 눈물과 목놓음으로 떠난 이들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쏟아내어도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주, 그것도 아주 꽤 자주 내가 사랑하는 친구와 애정을 갖고있는 이성과,  가족과 수많은 지근거리의 생명들을  "떠나보냄"이라는 과거의 이름표를 붙여놓은 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할 미래의 시간으로 먼저 다녀오곤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부질없음, 지금의 행복을 떠올리라는 긍정적 어휘들을 잠시 서랍 속 한켠에 넣어둔채, 그렇게 미래로의 시간으로 다녀온 날이면 울적함이 가시질 않는다. 

  그것은 분명 그 대상과 다시는 만날 수 없음에, 다시는 대화할 수 없음에 슬퍼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미리 하고 싶은 말과 주고 싶은 정과 사랑과 나의 아픔과 행복을 모두 나누어 준 채 나는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많은 이들과의 이별 그 자체보다 더 슬픈 것은 분명, 그들의 떠남 그 다음 단계로 마주할 "그리움", 그 냉혹한 단어가 아닐까.

 

있을 법한 이야기들, 그 속에서는..

죽은 자와의 이별은 어쩌면,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가 마치 구렁이로 환생하여 돌아온 것으로 느껴 이를 극진히 대접하고 돌려보내어 지루한 장마를 끝내는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윤흥길의 "장마"의 마지막 구절처럼 "지루한 장마" 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전쟁영화를 보며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수많은 전쟁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에 죽임을 당하는 자들과 아무런 비중이 없는 엑스트라들의 순각적인 폭격사, 총격사 정도로 다루어질 필요성도 없는 하찭음, 그 자체. 그들의 죽음의 장면이 어찌 저토록 가벼울 수 있는가.  

  모두가 영웅적 면모와 화려함에 집중했던 시리즈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던 영화 어벤져스의 "시빌워"는 아주 평범한(작중 인물의 직업이나 행실은 평범하지는 않으나) 비영웅의 죽음과 그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친의 아픔을 다룬다. 그리고 그 영웅의 아버지의 죽음에 집중한다. 그래서 나는 그 죽음에 포커스를 두었던 "시빌워"라는 작품을 사랑한다.

 

 

  나는 아마도 미치도록 슬플 것이다.

  내가 어느날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는 분명, 기쁨의 눈물과 함께 이제 막 세상과 마주한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나의 죽음을 언젠가는 보여줄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분명 타인의 죽음을 내가 지켜봐야만 한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의 죽음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그 사실 자체에. 

  그렇지만, "죽을만큼 아팠을 뿐", "죽은 것"은 아니기에 내일이 설령 내 남은 하루의 끝이라 강제적 통보를 받는다 하여도, 나는 미치도록 진부하게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사랑할 것이고 사과나무를 심고 있는 한 사람을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나의 언젠가의 마침표가 내 사랑하는 남은 이에게는 눈물의 선을 내려그어 쉼표로 그들이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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